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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물고기도 넋을 놓게 만드는 침어 서시(물고기도 가라 앉히다)

by 미스웰빙 2021. 8. 9.

중국의 미인들을 생각하다가 예전에 영화에서 보게 되었던 이름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서로 사랑하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인 서시를 적국의 왕에게 보내는 범려와 나라를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아름다운 서시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 서시

서시는 고대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본명은 시이광이며 서자라고 불렸습니다. 춘추시대는 주 왕조가 도읍을 옮긴 때로부터 진나라의 대부인 한, 위, 조 삼 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합니다. 서시는 춘추 시대 말기의 사람입니다. 현재의 저장성 사오싱 주지시 출신이며 왕소군, 양귀비, 우희와 함께 중국 4재 미녀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또한 이들 중 가장 으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무꾼의 딸로 저라산 자락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자세한 성장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서시가 살았던 당시 영라산 아래쪽에는 2개의 촌락이 동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시(施) 씨로 시이광이 서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서시(西施)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무꾼이었고 어머니는 빨래를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서시도 늘 시내에 나가 빨래를 했다고 합니다. 

 2. 부차와 구천

춘추시대 강남의 오나라와 월나라는 대대로 원수지간으로 끊임없이 싸워왔습니다.

오나라 왕 합려는 오자서의 보좌로 강국으로 키워 주변 국들을 공격하며 위세를 떨치며 월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월왕 구천의 반격에 밀려 패퇴하였습니다. 이때 입은 상처로 죽고 말았습니다.

 합려의 뒤를 이어 오나라 왕이 된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며 날마다 딱딱하고 차가운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면서 부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각오와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오자서의 보좌를 받아 오나라를 부흥시키며 월나라 왕 구천에게 복수심을 불태웠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구천은 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궤멸 직전까지 가게 됐습니다.

 싸움에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범려의 진언에 따라 대부 문종을 오나라의 태재 백비에게 보내 화해를 청했습니다. 백비는 문종이 가져온 황금, 옥 등 귀중품과 미녀를 보고 득의 만만해져 문종을 왕 부차에게 데려갔습니다.

 문종은 부차를 만나 월나라 왕이 월나라의 토지를 오나라 왕께 바치며 신하가 되길 간청한다고 했습니다.

 부차는 충신 오자서는 구천의 투항을 받아들이지 말고 죽일 것을 간언 하였으나 문중의 뇌물을 받은 간신 백비의 말에 설득 당해 문중이 보내온 예물을 거두고 월나라 왕 구천으로 하여금 오나라로 와서 자기를 모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구천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구천은 나랏일을 문종과 다른 대신에게 맡기고 자신은 처자식과 범려를 데리고 회계를 떠나 오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나라 왕 부차는 구천을 자신의 아버지 합려의 무덤 옆 돌 방에서 말을 먹이도록 했고 범려도 함께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부차가 수레를 타고 나갈 때면 구천은 그를 위해 말고삐를 잡고 수레를 몰기도 하는 등 부차를 모시는 구천의 자세는 참으로 주도면밀하고 정성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문종도 수시로 월나라 국내에서 각종 귀중품을 가져와 간신 백비에게 가져다 바쳤고 백비는 그의 왕 부차 앞에서 구천에 대해 좋은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부차가 병이 났는데 구천이 백비를 통해 부차의 침실로 들어가서 손수 부차를 간호했습니다. 구천은 부차의 변을 맛보고는 부차의 병이 나아질 것임을 예측하였는데 이에 감동을 받은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낼 마음을 품게 되어 병이 나은 후 구천 부부와 범려를 석방하여 월나라로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3년 동안 부차의 시중을 들다가 귀국한 월왕 구천(勾踐)은 와신상담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이때 범려와 대부(大夫) 문종(腫)이 미인계를 권하여 전국적으로 미인을 선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명의 미녀인 서시와 정단을 데려와 나이든 궁녀들은 노래와 춤, 악기, 남자의 마음을 잡는 말과 행동 등을 가르치고 범려는 학문과 (경전과 시) 책략 등을 가르쳤습니다.

 3. 미인계

재상 범려를 사신으로 보내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쳐 부차를 미혹시키려 하였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서시의 미모를 한번 보고자 몰려 들었고 역관(驛館)으로 몰려가 그녀를 맞이 하였으며 거리의 인파가 가득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이야기에 따르면 서시를 데려간 월나라의 대부 범려는 미인을 보려 하는 사람은 돈을 내야 한다고 하며 역관 내에 돈궤를 마련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가득 차고 넘쳤으며 3일간 거두어 들인 돈을 월로 가져가 국가 재정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범려는 오왕 부차를 만나 꿇어앉으며 말하기를 “동해의 적신 구천이 대왕의 은덕에 감복하여 나라 안을 뒤져서 가무에 능한 여자를 구해서 왕께 바치오니 하녀로라도 쓰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에게 진언하기를 “신이 듣기에는 하(夏)는 말희(妺喜)로 인해 망하였고 은(銀)도 달기(妲己)로 인해 망하였으며 주(周)가 망한 것도 포사로 인한 것이니 무릇 미인이라는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요인이니 청컨대 받으시면 아니 될 것입니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오왕은 이를 듣지 않고 바로 서시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오왕은 고소대(姑蘇臺)에 춘소궁(春宵宮)을 짓고 영암산 위에 관왜궁(涫娃宮)을 지었으며 큰 연못을 파서 서시로 하여금 놀게 하는 등 부차는 서시를 매우 총애하며 국사를 등한시하였습니다.서시에게 기울어지는 부차의 마음 때문에 정단은 화병이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오나라에 도착한 지년 만에 20세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오나라 왕 부차는 월나라를 대파한 공에 자아도취되어 안일과 환락에 빠져들었습니다. 부차는 충신 오자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점차 그를 멀리하였습니다. 오자서는 오나라의 앞날에 화가 미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는데 그와 사이가 나쁜 태재 백비가 이 일을 내세워 모함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차는 오자서에게 촉루라는 명검을 매려 자결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오자서는 한탄하며 오왕의 사자에게 “슬프다. 간신 백비가 나라를 망치는데 총신을 죽이는가. 나는 그대 부친을 패자로 만들었고 여러 공자들 중 그대를 즉위시켰다. 그대는 나라의 반을 내게 준다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그런 나를 의심하고 죽이니 이제 오나라에는 범려를 당할 사람이 없어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문객에게 “내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어라 부차의 관을 짤 때 쓸 나무다. 그리고 내 눈알을 빼서 동문에 걸어라 월나라의 군대가 오는 것을 지켜보겠다”라고 당부하고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부차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그의 시신을 말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강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서산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오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오자서가 백비와의 권력 투쟁 중에 사망하는 동안 월나라의 구천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나라를 회복시킬 결심을 굳히고 문종에게는 정치를 범려에게는 군대를 맡기고 전 국민에게 분발해서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호소했습니다.

 구천은 자신의 투지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편안한 생활을 마다했습니다. 이불을 덮지 않고 침상에는 장작을 깔아 놓고 옆에는 쓰디쓴 쓸개를 준비해서 식전 또는 휴식 시간에 늘 그 쓰디쓴 맛을 보며 의지를 다졌다고 합니다. 이것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고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의 와신상담입니다. 

 그는 10년간의 준비를 통해 인구를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한편, 국민과 군대의 교육과 훈련에도 박차를 가했습니다. 여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십년생취’, 신년교훈’입니다. 

 이렇게 10년 만에 국세를 회복하고 날로 발전하며 강대해진 월나라와는 달리 오나라의 부차는 서시와의 향락에 빠져 지냈습니다. 간신 백비의 말을 듣고 월나라를 끝까지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충신 오자서를 죽이면서까지 월나라 경계에 소홀하게 되는 등 오나라의 정치는 혼미해졌습니다.

 4. 오나라의 멸망

결국 오왕 부차가 중원의 희맹에 나갔을 때를 노리고 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합니다. 성이 포위된 상황 속에서 2년 여간 버티던 부차는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내가 죽어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고 말한 후 자결하였습니다. 이로서 한때 패자의 위세를 떨치던 강성한 오나라는 고작 몇 년 만에 허무하게 멸망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오나라와 월나라의 기나긴 쟁투가 끝을 맺었습니다.

월나라의 일등공신 범려는 오나라가 멸망하자 사퇴를 청하였습니다. 구천이 만류하였으나 범려는 이를 거절하고 오호에 작은 배를 띄웠는데 그 후로 아무도 그의 종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범려는 또 다른 공신이었던 문종에게 “구천은 같이 환난을 견딜 수는 있으나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는 사람이다”라며 떠나자고 권유하였으나 문종은 끝내 월나라에 남았습니다.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을 염려하여 ‘새는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토사구팽’이란 고사성어가 나옵니다.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뜻이다.  그 후 어떤 신하가 구천에게 문종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소하여 결국 문종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구천은 복수에 성공하고 월나라의 전성기를 열었지만 말년에는 그 역시 모략을 믿어 고난을 함께 했던 신하 범려를 떠나보내고 명신 문종을 자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월나라의 전선기는 길지도 않았으며 구천도 오래가지 않아 병사했다고 합니다. 구천 사후에 월나라는 쇠퇴하였으며 결국 초나라에게 멸망당합니다.

 5. 뒤 이야기

오나라가 패망한 뒤의 서시는 월왕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인 월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당합니다.

 중국의 사가들은 오나라가 망한 후 서시의 일생에 대하여 많은 설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 서시는 범려의 연인으로 오나라가 망한 후 그가 월왕의 봉작을 포기하고 밤중에 서시를 데리고 사라졌으며 범려와 함께 제나라로 가서 장사를 통해 큰 재물을 모았고 태호에서 세상을 피해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설로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한 후 월의 구천이 서시를 궁으로 부르지만 범려가 그녀와 강에서 만나 그녀를 설득하고 서시가 강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나 오나라가 망할 때 분노한 백성들이 서시를 죽였다는 설도 있지만 모두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설은 오나라가 멸망한 후 구천의 부인이 서시의 미모를 보고 구천이 그녀를 좋아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오나라 사람들에게 서시가 나라를 멸망하게 한 요부라고 믿게 하면서 그녀를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뜨려 죽게 하였으며 후에 강에서 조개가 발견되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길 이것이 서시의 혀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6. 관련고사

서시와 관련한 여러 고사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침어(侵漁)입니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부러움을 샀는데 하루는 강가에서 빨래하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습니다 이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현재 서시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저장성의 제기 시에는 서시가 빨래하던 전설의 장소를 완사(浣紗)라 하여 관광지로 조성하였습니다.

 [장자]에는 효빈(效嚬)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속병이 있던 서시가 이마를 찌푸리고 걷고 있었는데 이 마을의 추녀가 그래야 아름다운 줄 알고 자기도 역시 가슴에 두 손을 얹고서 남이 보는 데서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추녀의 그 모습을 보고 마을의 부자는 문을 굳게 닫아걸고서 나가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처자를 데리고 다른 고장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빈축’이라는 단어도 파생되었는데 역시 찡그린다는 뜻입니다. 훗날 다른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행을 비유할 때 ‘빈축을 산다’고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동쪽 마을에 살았던 서시가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 했는데 여기서 ‘동시 빈축’이라는 사자성어가 파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