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정보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타지마할~~

by 미스웰빙 2021. 8. 7.

조경의 역사를 공부하다가 인도의 무굴제국시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아름다운 조경을 만들었다는 타지마할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개요)1631-1648년 무굴 제국의 황제 샤자한(Shah Jahan)이 사랑하는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아그라(Agra)에 건립하였습니다.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묘당인 타지마할은 인도 이슬람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계 유산의 최고 걸작입니다.

 1.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인도 ‘아구라’에 위치한 무굴 제국의 대표적 건축물입니다.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총애하였던 부인 ‘몸타즈 마할’로 아려진 ‘아르주망 바누 베굼’을 기리기 위하여 1632년에 무덤 건축을 명하여 2만여 명이 넘는 노동자를 동원하여 건설하였습니다.

 건축의 총책임자는 ‘우스타드 아마드 로하리’로 알려져 있고 ‘몸타즈 마할’이 죽은지 6개월 후부터 건설을 시작하여 완공에 22년이 걸렸습니다.

 타지마할은 총 17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무덤군의 중신 부분이며 실제로 무덤군은 응접실, 모스크 등이 따로 딸려있습니다. 영묘의 건설은 거의 대부분 1643년에 완료되었으나 추가적인 보조 작업이 약 10년 동안 진행되어 1653년에야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타지마할을 건설하는 데에는 당시 가치로3천2백만 루피아, 현재의 가치로는 8억2천7백만 달러가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타지마할 건설 당시 황제 직속 건축가인 ‘우스타드 아흐메드 라하우리’의 감독 아래 20,000여 명에 달하는 예술가들이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타지마할은 페르시아, 터키, 인도 및 이슬람의 건축 양식이 잘 조합된 무굴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입니다. 1983년 타지마할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흰색 대리석 돔의 영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타지마할의 규모는 더 큽니다. 네 귀퉁이의 높이 40m의 미나레트는 수직으로 보이나 붕괴가 발생했을 때 건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미세하게 바깥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샤 자한이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을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궁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다는 설화가 내려오지만 거의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를 그저 허구적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2.    무굴 제국

중앙아시아에서 성장한 무굴 세력은 인도 중심부를 차지한 또 하나의 이슬람 왕조였습니다.

 1526년 봄, 파니파트 벌판에서 10배나 많은 인도군과 마주한 티무르의 5대손이며 몽골의 후손이라고 자처해 온 바부르는 인도 군대를 단3시간 만에 무찔러 버렸습니다. 초원을 뒤로하고 풍요로운 땅을 찾아 나선 바부르는 이 싸움으로 인도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코끼리를 앞세워 적을 겁주고 가끔씩 대포를 쏘는 인도군에 비해 바부르의 군대는 빠른 말과 정확한 대포 솜씨로 상대를 압도하여 작은 나라로 분열된 델리 술탄 왕조를 무너뜨리며 거침없이 인도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중앙아시아와 북인도 지역을 확보하면서 동, 서 무역의 핵심 길목을 차지하게 된 바부르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함께 거머쥐었습니다. 1526년 북인도의 중심지 델리와 아그라를 차지하고서 스스로 ‘인도 황제(파드 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무굴 제국을 오늘날 인도를 대표하는 왕조로 만들어 놓으며 제국의 틀을 잡은 ‘악바르’는 할아버지 바부르의 총애 속에 아버지 후마윤의 용맹함을 물려받아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초반에는 이민족의 침략과 북인도 지역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조심스럽게 극복하고 국력을 키워 나가며 수라트 항구, 벵골 지역, 데탄 고원을 넘어 인도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졌습니다

 악바르는 단지 정복 전쟁에만 몰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무굴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먼저 전통적으로 인도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북서부의 라지푸트와 구자라트 사람들을 잘 다독여 가장 충성스러운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악바르 자신은 이슬람교도였지만 힌두 교도와 비이슬람 인들을 억압하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모두에게 고르게 기회를 주어 출신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제국을 위해 일할 사람을 뽑았습니다. 나아가 제국 최대의 반대 세력이자 힌두 교도 많았던 자지푸트 족의 공주와 결혼하여 몸소 화합의 정치를 선보였습니다.

 16세기 무굴 제국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의 인도 진출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이슬람 교가 전파된 길을 따라 아라비아의 전통과 페르시아의 문화, 튀르크 인의 풍습이 함께 실려 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하던 세력이 인도를 차지하면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차츰 문화 면에서도 기존의 힌두교와 외부에서 온 이슬람 교가 융합되어 갔습니다. 종교와 건축, 언어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3.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안 샤 자한은 1628년부터 1658년까지 인도아대륙을 다스렸습니다. ‘샤 자한’이란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바부르’, ‘후마윤’, ‘악바르’,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5번째 무굴 황제입니다.

 ‘샤 자한’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한기르’가 죽은 뒤 무굴 황제가 될 사람으로 점찍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1627년 ‘샤 자한’은 권좌에 올랐습니다.

‘샤 자한’은 위대한 무굴인 중 한 명으로 그의 치세는 무굴 제국 또는 인도 문명의 가장 빛나는 시대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샤 자한’이 죽기 직전인 1666년 그는 지구 상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사람이었고 무굴 제국은3,000,000km 2에 달하는 영토를 지배했으며 그의 수도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번영했으며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인 ‘샤 자한’의 아내 ‘몸타즈 마할’은 ‘궁정의 선택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샤 자한 황제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자한기르가 직접 내려 준 이름이라고 합니다.

 황제들이 전쟁터로 떠나거나 장거리 원정에 오르면서 훗날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를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왕비를 전쟁터까지 데려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샤 자한이 왕비를 전쟁터까지 데려간 것은 뭄타즈 마할이 아내인 동시에 정치적인 조언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데칸고원 지역에서 샤 자한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뭄타즈 마할 왕비는 근처 야외 천막에서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습니다. (낳고 나서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죽었다거나 병이 나서 죽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평소 아내를 극진하게 사랑했던 샤 자한은 죽자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백성들에게 2년 동안 왕비를 추모하는 기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슬픔에 빠져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샤 자한은 그녀를 위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주기로 계획하였습니다.(몸타즈 마할이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을 가장 아름다운 무덤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후 샤 자한은 1632년부터 무려 2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공들여 흰 대리석으로 타지마할을 건설하였습니다. 영묘의 건설과 장식 작업은 1648년에 끝났으나 주변의 정원과 부속 건물들은 5년 후인 165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하지만 타지마할을 건설하는 동안 제국의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막대한 양의 예산이 투입되었기에 막대한 세금과 과도한 수탈로 전국에서 민심이 악화하였습니다. 또한 샤 자한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정무에 무관심해졌고 결국 샤 자한의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반란을 일으켜 샤 자한을 폐위시킨 후 아그라 성에 감금해 버렸습니다.

 이후 샤 자한은 아그라 성의 창문으로만 멀리서 타지마할을 감상할 수 있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죽을 때까지 아그라 성에 갇혀 살았습니다. 나중에 샤 자한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해는 타지마할 안에 있는 몸타즈 마할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참고로 야사에서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감탄한 햐 자한이 자신의 무덤을 검은색 대리석으로 똑같이 만들라고 지시하였다가 반란으로 인해 포기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인도 학계 측에서는 이를 근거 없는 낭설로만 치부하고 있습니다. 이 설화가 시작된 배경은 1665년 아그라를 방문했던 유럽의 여행가 장 밥티스트 타베르니에르가 자신의 소설에 ‘검은빛의 타지마할’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소설이 널리 퍼져나감에 따라 사람들이 샤 자한이 ‘검은빛의 타지마할’을 지으려 했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4.    타지마할의 건축

타지마할의 건축은 주로 페르시아 양식과 초기 무굴 양식이 혼합되어 지어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는 티무르 제국시대의 건축 양식을 담습 한 것인데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무덤인 구-에 아미르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본디 초기 무굴 양식의 건물들은 주로 붉은빛 사암으로 지어진 경우가 많았는데 샤 자한은 타지마할을 완전히 순백색의 대리석과 보석들만 이용해서 만들 것을 지시하였고 이러한 샤 자한의 독특한 취향 때문에 무굴 제국의 건축물들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새로운 방향으로 크게 발전하게 됐습니다.

 타지마할은 아그라 성벽 도시의 남부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타지마할의 부지는 황제의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에 샤 자한은 그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부지의 원 소유자였던 ‘마하라자 자이 싱’ 에게 아그라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궁전을 대가로 치러야 했습니다.

 거의 1.2헥타르에 달하는 토지가 파헤쳐졌고 원래 강가에 있던 부지의 단점을 메우기 위해 엄청난 양의 토사를 채워 넣어 지반이 침하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이 작으로 인해 강둑에서 약50m 정도 더 높이를 높게 하였습니다. 영묘가 세워질 자리에는 우물을 판 다음 그 자리에 자갈과 흙들을 채워 넣어 건물들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보통 당시에 건물을 건설할 때 깎은 대나무와 같은 재료로 건물의 공사 지지대를 세웠던 것과 달리 타지마할은 건설할 때에는 단단한 벽돌로 인부들이 오고 다닐 공사 지지대를 세웠습니다. 이 때 워낙 이 지지대를 단단히 쌓은지라 사람들은 이 골조를 해체하는 것만으로도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타지마할에 쓰인 재료들은 인도와 아시아 전역에서 수급되었는데 거의 1000여 마리에 달하는 코끼리들이 이 재료들을 운송하는 데에 투입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뿐만 아니라 22,000여 명의 인부들, 화가들, 보석 세공인, 석공들이 타지마할의 건설에 참여하였습니다.

 타지마할을 이루는 반투명한 백색 대리석은 인도 라자스타 주의 마크라나에서 파내 왔고 펀자부의 벽옥, 중국의 옥과 수정, 티베트의 터키옥, 아프가니스탄의 라피스 라즐리, 스리랑카의 사파이어, 아라비아 반도의 홍옥 등을 사용했습니다. 28종류에 달하는 보석들과 준보석들이 백색 대리석을 꾸미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영묘 본 건물과 타지마할은 약 12년에 걸쳐 모두 완공되었습니다. 다만 미나레트, 모스크, 응접실과 같은 부속 건물들의 건설은 약 10여 년이 추가적으로 더 걸렸습니다. 이처럼 한 건물군 안에서도 완공된 시기가 각각 다르기에 타지마할의 완공 시점을 정확히 언제로 보아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습니다.

영묘 자체의 건설은 1643년에 끝났으나 보조 건물들의 완성은 10년 후에야 다 끝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2년 동안의 공사 끝에 타지마할은 환상적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건물 전체가 희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타지마할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완벽한 대칭을 이룬 건축물입니다.

 타지마할은 인공으로 만든 7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기단 위에 세워진 건물은 한 면의 길이가 58m 정도이고 중앙 돔이 세워진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65m에 달합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의 모퉁이에 세워진 미나레트의 높이도 50m나 됩니다.

 타지마할을 둘러보다 보면 우아한 꽃과 코란(이슬람 경전),독특한 문양의 조각, 반복적인 문양으로 장식된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대리석 위에 새겨진 꽃과 코란, 조각, 문양은 아름다우면서도 하나 같이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장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건물 안에는 가지각색의 돌로 아름답게 꾸며진 묘가 있습니다. 건물이 완성될 당시에는 뭄타즈 마할의 묘만 있었지만 현재는 샤 자한 황제와 뭄타즈 마할이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물론 화려하고 우아한 꽃으로 장식된 관은 모형이고, 실제 시신은 타지마할의 지하에 있습니다. 황제와 왕비가 잠들어 있는 묘지 주변은 나지막한 칸막이가 둘려 있어 묘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타지마할 동쪽과 서쪽에는 타지마할을 향해 같은 모양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동쪽 건물은 나라에 중요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 머무는 영빈관으로 사용하였으며 서쪽 건물은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두 건물을 지은 진짜 목적은 타지마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타지마할을 짓는 데에 총얼마가 소요되었을지에 대해서도 시대마다 약간씩 다른 추측 결과들이 나왔으나 현재 고고학계는 당시 가격으로 약3천2백만 루피 현대 가치로는 약 5천2백8십억 루피(8조 2천7백만 달러)가 쓰였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