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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중국 당나라 6대 왕 현종과 양귀비(712-756년)의 치명적인 사랑에 대하여

by 미스웰빙 2021. 8. 6.

조경 역사를 배우면서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정원으로 ‘온 천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온천궁’은 당 현종 때 ‘화청궁’으로 바꿔 불리었습니다.  이 ‘화청궁’은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해당탕’이 있는 곳이며 이 때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당 현종 말기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화청지’는 대부분 불타고 후에 청나라와 중국 정부에서 30%만 복원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개요) 후대에 칭송 받는 현종의 정치는 후반기에 며느리 양옥환을 귀비로 삼으면서 180도 바뀌었습니다. 양귀비에게 빠져 있는 현종 대신 실권을 쥔 이임보가 양귀비를 조종해 독재 정치를 하자, 755년 절도사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당은 쇠퇴의 길로 들어 섰습니다.

 1.   청년 황제 현종당의 전성기를 이끌다.

당의 제 5대 황제 예종은 실력 있는 3남인 융기(隆基)에게 절대적이 신뢰를 주어, 두 명의 형을 물러서게 하고 황태자로 봉한 후 재위 2년 만에 황제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이 융기가 제 6대 황제 현종(玄宗)입니다. 스물여덟 나이로 즉위한 청년 황제 현종은 정열적으로 정치개혁에 착수 했습니다.

 현종의 치세에는 두 개의 연호가 사용되었습니다. 29년 개원(開元)과 14년 천보(天寶)입니다 이 40여 년에 걸친 ‘개원, 천보’라는 연호는 중국 역사상의 전성기를 의미합니다. 천보 원년의 호수는 852만 5천여 호이고 인구는 4890만 9,800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2.   무혜비 황후가 되다.

그러나 이 ‘개원의 치’라 하여 후대에 칭송을 받는 현종의 정치는 후반기에 들면서 180도의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영웅은 색(色)을 좋아한다’는 격언대로 현종은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많은 후궁을 총애했는데, 그 중에서도 무혜비(武惠妃)에 빠져 지냈습니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고락을 함께 해온 황후 왕씨(王氏)를 끝내 폐하고 무혜비를 황후로 삼았습니다.

무혜비, 즉 정순무(貞順武)황후는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의 일족(一族)인 항안왕(恒安王) 무유지(武攸止)의 딸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어려서부터 고모할머니인 측천무후의 보살핌을 받아 궁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712년 현종이 황위에 오른 뒤 총애를 받았으며 724년 왕황후가 폐서인(廢庶人) 된 뒤 혜비(惠妃)로 봉해졌습니다. 혜비는 숙비(淑妃), 덕비(德妃)와 함께 삼부인(三夫人)이라고 일컬어지며 귀비(貴妃)라고도 하므로 무귀비(武貴妃)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현종은 무혜비를 매우 총애하여 황후로 삼으려 하였으나 어사(御使) 반호례의

간언으로 중단하였습니다. 반호례는 상소에서 무혜비가 중종(中宗) 때에 위황후(危慌後)와 더불어 정치를 농단하였던 무삼사(武三思)의 일족으로 백성들의 반감이 크며 태자의 지위를 위협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무혜비는 황후가 되지는 못했지만 궁중에서 황후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무혜비의 친어머니인 양씨(楊氏)는 정국부인(政局夫人)으로 봉해졌으며 두 동생도 각각 국자좨주(國子祭酒)와 비서감(秘書監)의 벼슬에 이르렀습니다.

 무혜비는 현종과의 사이에서 하도왕(夏悼王) 이일(李一)과 회애왕(懷哀王) 이민(李敏) 상선공주(上仙公主)등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현종은 이를 매우 아타까워하며 무혜비가 이모를 낳자 오래 살라는 뜻에서 ‘수왕’으로 봉했으며 자신의  큰형인 영왕 이헌에게 맡겨 키웠습니다. 그 뒤에도 무혜비는 성왕 이기(李埼), 함의공주(含意公主), 태화공주(太和公主) 등의 자녀들을 더 낳았씁니다.

 현종의 총애를 받은 무혜비는 함의공주의 남편 양회등과 공모하여 황태자 이영이 악왕 이요, 광왕 이거 등과 사당(私黨)을 거느리고 무혜비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현종에게 모함하였습니다. 현종은 노하여 황태자를 곧바로 폐위시키려 하였으나 재상 장구령 등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장구령이 좌천되고 이임보가 그 지위를 대신하자 737년 무혜비와 양회는 다시 계략을 꾸며 황태자 이영을 비롯한 삼왕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하여 황태자 이영과 악왕 이요, 광왕 이거 등을 폐서인 한 뒤 살해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삼서인(三庶人)이라 부르며 그 억울함을 원통해 했습니다.

 하지만 세 명의 왕자를 모함하여 죽인 뒤 무혜비는 병이 들어 누웠습니다. 세 왕자의 원혼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성대히 장례를 치르기도 했지만 무혜비는 회복하지 못하고 38세의 나이로 죽었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던 뜻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현종은 그녀를 경릉에  묻고 정순황후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현종의 뒤를 이러 즉위한 숙종(肅宗)은 그녀가 세 왕자를 모함하여 죽인 일을 문제 삼아 황후로 제사 내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3. 현종며느리 양옥환을 귀비로 삼다.

무혜비를 잃고 왕자들을 억울하게 죽게 한 슬픔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현종은 전국에 화조사(花鳥使)를 파송 하였습니다. 나라 안의 미녀를 찾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미녀를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현종의 눈에 드는 미인은 궁중에 있었습니다. 무혜비의 소생인 수왕의 비인 ‘양옥환(楊玉環)이었습니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구느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인 중 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는 아편 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명은 양옥환이며 잠시 도가에 입문했을 때 법명은 태진(太眞)입니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가 되었습니다. 수왕 이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 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양옥환과 수왕의 사이가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별 풍파 없이 양옥환이 수왕과 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천수를 다하며 해로하였을지도 모르고 당나라도 혼란에 휩싸여 자멸의 길로 걸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듯이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6년간 수왕 이모의 아내로 살던 스물세 살의 양옥환은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습니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 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습니다. 그 중에 수왕 이모의 아내 양옥환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냅니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습니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입니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주위의 눈은 신경 쓰이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현종은 며느리인 양옥환을 차지하기 위해 수왕과 그녀를 이혼시켰습니다. 그런 후 일단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킵니다.

도가에서는 일단 입문을 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종은 이런 도가사상을 자기의 몰염치한 사랑에 이용했습니다. 이 때 양옥환은 태진이라는 도호도 얻었습니다.

그 사이 현종은 미안해진 아들 수왕에게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습니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현종은 꿈에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현종의 나이 61세, 양귀비는 27세가 되던 해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습니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 다름 없는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현종은 젊었을 때 꽤나 정치에 소질이 있는 황제였습니다. 치세 전반기는 현종의 연호를 따라 ‘개원의 치’라는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나긴 태평성세에 마음이 해이해진 현종은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습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누대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천리 밖에서 열리는 과실 여주를 매일 공수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습니다. 훗날 백거이(白居易)가 <장한가(長恨歌)>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궁정에서 환락의 생활에 빠졌습니다.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물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조차 넘겨주는 일을 서슴 없이 행한 현종은 여산(驪山)의 온천에 있는 화청궁(華淸宮)에서 사시사철 지냈습니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양귀비는 늘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역사서에 보면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입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습니다. 

양귀비에게 빠져 있는 현종 대신 실권을 쥐게 된 재상 이임보(李林甫는 양귀비를 조종하여 독재 정치를 하였습니다. 현종은 명신 장구령(張九齡)의 충성 어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는 말을 듣던 이임보만 절대적으로 신임하였습니다.

 이임보가 죽은 후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이 재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양쇠(楊釗)였습니다. 양쇠는 술고래에 도박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 이외에는 달리 재능이 없는 건달이었습니다. 그는 양귀비의 추천으로 궁정에 드나들게 되었고 현종의 신임을 얻어 ‘국충’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나중에는 재상으로 발탁되어 권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현종은 양국충뿐 아니라 양귀비의 언니들 세 명에게도 호화 저택을 하사 하고 한국(韓國), 괵국(㶁國),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했습니다.  그 친척들을 고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천하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4.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 한다)’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755년 절도사인 ‘안녹산’이 간신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인 안녹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습니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녹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움 가까이 하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양귀비가 안녹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현종은 안녹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녹산을 총애하는 만큼 더욱 안녹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습니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녹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양국충은 안녹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눈치 챈 안녹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입니다.

안녹산의 반란군이 장안을 공격하자 현종은 양씨 일족과 함께 촉(蜀)으로 피신하려 하였습니다. 그 도중 섬서성 마외역(馬嵬繹)에서 황제를 호위하고 가던 근위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국난을 불러들인 원흉은 양씨 일족이라고 규탄하며 양국충을 비롯하여 양씨 일족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양귀비도 죽여야 한다고 현종을 윽박질렀습니다. 현종은 사랑과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양귀비와 함께 장렬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보호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하였습니다.

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모든 책임을 양귀비에게 덮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종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가 양귀비를 목 졸라 죽였습니다 이 때 양귀비의 나이 서른 여덟 살이었습니다. 양귀비가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나자 현종은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양귀비가 죽고 실의에 빠진 현종은 황제 자리를 황태자인 숙종(肅宗)에게 넘겨 주고 사천으로 피난하였습니다. 숙종이 의병을 모집하여 장안을 탈환했기 때문에 상황(上皇)이 된 현종은 757년에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종은 자신의 거처에 지난날의 귀비 초상을 걸고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현종은 실의 속에 77세의 나이로 운명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재미 있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해 고력사나 따라간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녀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30여 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들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